영국 성공회의 영적 거장이자 신학자였던 로완 윌리엄스는 그의 책 "Being Christian"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하나님과 마주 앉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는 하나님과의 대화에 초대되어 식탁에 마주앉아 경청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친근하면서도 추상적인 ‘함께’라는 단어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정의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떠올려볼까요? 예수님이 바로 내 앞에 앉아 식사하시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계십니다.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감정이 담겨있는 나의 눈동자에 당신의 눈을 맞추십니다. 긴 말이 필요 없이 나의 처지와 성정을, 인생을 전부 이해하신다며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이 장면을 일터에서, 부엌에서, 식탁에서, 침대에서 떠올려보면,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녀를 양육해보니 전과는 다르게 이해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뒤짚기를 하던 아기가 기어다니고, 일어서더니, 이제는 걷고 뛰어다닙니다. 처음 뒤짚었을 때 이보다 더 뭉클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요즘 내 손을 꼭 잡고 산책을 할 때면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뛰어와 나에게 안기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옹알이를 하던 아기가 ‘엄마’, ‘아빠’를 외치더니 요즘은 문장을 말하려고 합니다. ‘좋아요! 아멘! 사랑해요’ 짧은 대화로라도 소통하는 오늘이 신비롭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눌 내일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진실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와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간절히 교제하고 싶어, 자신의 아들 예수까지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그 안에 거하며 하나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요17:21). 그분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마1:23),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마28:20).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도 마주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영원 전부터 맺어오던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을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생 일대의 기도를 드리시는 순간에도, 피곤하여 잠든 제자들을 긍휼히 바라보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잠든 그들을 이해해 주셨고 절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을 때, 예수님은 고난 당하시면서도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사탄이 밀 까부르듯 베드로를 정죄하여 넘어트리지 않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럴만하게 포장한 순간만이 아니라, 피곤하고 넘어지는 우리의 순간에도 마주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바뀌는 것이 참된 신앙성장입니다. 어쩔 수 없어 일주일에 한 시간 엉덩이를 붙이며 출석 체크하던 우리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하는 것,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 것, 더 드리고 싶어 하는 것, 모든 순간을 마주앉아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이런 은혜를 간절히 소망합니다.